[이 주일의 설교] 바울에게서 배우는 자족의 비결(빌 4:10~20)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이 삶을 만족하게 만듭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이재범 목사(대구 남부교회)
이재범 목사(대구 남부교회)

우리의 삶은 환경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환경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아무도 이것이 왜 변하는지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나 살려면 이 변화를 무시할 수 없고, 그 변하는 환경에 맞춰가야 합니다. 이것을 ‘적응(適應)’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변화무쌍한 세속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적응하는가 입니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11절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말합니다. 여기 배웠다는 것은 경험에 의해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야말로 생의 여러 난관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 속에서 ‘자족의 비결’을 배웠으므로 그는 환경을 정복하고 승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여러분도 환경을 정복하고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환경에 짓눌려 살고 있습니까?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내가 크게 기뻐한다”라고 말합니다.(10절) 형편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물질적인 만족도에 따라 좌우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외적 환경과는 무관하였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감옥 안에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도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울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했습니다.

섭리를 나타내는 ‘providence’는 라틴어 ‘pro’(앞)와 ‘video’(보다)의 복합어로, ‘하나님께서 앞질러서 그것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환경과 상황에 맞게 필요한 것을 설계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좋은 예를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일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17살 때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 갔습니다. 거기서 보디발의 아내를 시중들던 중에 누명을 쓰고 억울한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악조건 속에서도 불평이나 원망없이 성실한 삶을 살아갑니다.

결국 하나님의 때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세월이 흘러 자기를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원수 같은 형들을 껴안고 정에 북받쳐 목놓아 울고 있는 요셉의 아름다운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은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나의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형들이 자기를 팔아버렸는데 미움과 원망과 복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를 노예로 전락시킨 형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고 부둥켜안고 울 수 있었을까요? 요셉에겐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섭리신앙을 가질 때 사람의 차원에서 창조주의 차원으로, 상대적인 사랑에서 절대적 사랑으로 바뀌게 됩니다.

아무리 큰 불행을 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섭리신앙을 가진 요셉은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 첫 자리에 모시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범사에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우리는 여기서 운명적인 불행한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요셉의 믿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괴롭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불평, 원망, 한탄 없이 환경에 적응하여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과 같이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시고 계십니다. 환경을 사용하셔서 그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성실하게 삽시다. 부유하더라도 죄짓지 말고 겸손하고, 가난하더라도 비굴하지 말고 곧고 바르게 삽시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절) 바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영적인 만족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의 사역에 있어서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힘에 의존했습니다.(1:6, 2:12~13, 3:10)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내가 덧입고 산다는 것, 곧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1절에 나오는 자족의 방법을 극기주의적 입장에서는 욕망과 감정을 자기 의지로 억제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극기주의자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도록 채워가는 것이지만, 바울의 자족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심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결과를 보면 극기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잔인하게 짓누르므로 욕구불만에 빠지게 되어 실패했지만, 바울이 가르쳐 준 믿음 안의 자족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함으로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심각한 패배주의입니다. 패배주의에 빠지게 될 때 상대방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자신을 과소평가하게 됩니다. 이는 겸손과는 다른 것입니다. 노예근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서는 자세는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과 용기가 있는 지도자입니다. 다른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낙담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오히려 힘과 용기를 주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결코 교만한 마음에서 대적들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거짓 장담을 하여 인기를 얻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4:9)

주님은 창조자시며, 만물의 주관자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환경에 꼼짝 못하는 제자처럼 생각하고 사십니까? 마태복음 8장 23~27절에 나오는 풍랑을 만나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제자들처럼, 그 배 안에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잊고 사는 어리석은 생활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자족하는 생활은 모든 일, 모든 사람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 해방, 자유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 물질, 관심 등 이런 것에 쉽게 좌우되지 맙시다. 이런 것들 때문에 힘을 잃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거인 골리앗 앞에 선 소년 다윗처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는 자세로 칼, 창, 단창과 같은 환경을 맨주먹으로라도 담대히 극복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19절) 이 말씀은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바울에게 선교비를 보낸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우리가 18절에 있는 말씀대로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만 한다면, 19절의 약속은 꼭 이뤄질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의 적응은 믿지 않는 사람의 경우처럼 단지 먹고 산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적응은 거시적 안목의 적응, 곧 바람직한 세대를 향한 전형으로서의 적응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는 말씀처럼 사는 것이 오늘의 환경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적응일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을 잡아주는 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하나님의 약속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그 약속은 무의미한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배롭고 우리들의 삶의 목적을 알게 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큰 약속인 것입니다. 이 약속의 목적은 사람을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게 하며,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자족의 근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으로 생의 만족을 구하십니까? 부, 지위, 명예, 향락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에게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약속이 자족의 근거임을 알고 체험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생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만족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그러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워 환경을 정복하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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