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도 조영남 왜 쎄시봉 갔나···기억속 단초는 ‘뜨거운 염문’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2〉 ‘쎄시봉’과 첫 인연

1960~1970년대 음악다방 쎄시봉은 청바지·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 문화의 상징 같은 곳이었다. 숱한 스타가 이곳을 거쳐 갔다. 왼쪽부터 윤형주·김세환·조영남(앉은 이)·송창식·조동진·이장희씨. 1986년 미국 LA 슈라인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쎄시봉 공연 당시 모습. [사진 조영남]

1960~1970년대 음악다방 쎄시봉은 청바지·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 문화의 상징 같은 곳이었다. 숱한 스타가 이곳을 거쳐 갔다. 왼쪽부터 윤형주·김세환·조영남(앉은 이)·송창식·조동진·이장희씨. 1986년 미국 LA 슈라인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쎄시봉 공연 당시 모습. [사진 조영남]

우선 지난주 중앙SUNDAY의 새로운 연재 ‘예스터데이’를 읽어 주신 분들께 큰절 올린다. 인사말을 겸해서 내 재판 얘기를 썼던 건데 그런대로 무난히 통과된 것 같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전적 이야기의 정석대로 언제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살았는지부터 써내려가고 있던 중 중앙SUNDAY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첫 회 내용을 재판 얘기로 무난히 끝냈는데 그 다음회를 그렇게 통속적으로 나가면 흐름이 끊길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 하고 스톱모션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쪽에서 당연하다는 듯 쎄시봉 얘기부터 쓰자는 것이다. 가만있자! 이건 중앙SUNDAY가 나한테 갑질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번에도 하는 수 없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했다. 조영남 성질 다 죽었다. 그래서 독자들께서는 과연 이 놀음이 맞는지 안 맞는지 잘 관찰해 보시길 바라는 바이다.  
 

고교 콩쿠르 1등, 성악도로 촉망
오페라, 돈 안되고 재미없다 판단
대학·교회에 반감 탓 쎄시봉 발길

이북 사투리 주인, 데뷔 당일 OK
입장권 안 내고 프리패스 멤버로
송창식·윤형주·이장희 등 뒤따라

글쎄! 내가 거길 왜 갔을까. 쎄시봉 말이다. 그때 나는 음악대학을 다니는 촉망받는 성악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길 왜 갔는지 생각이 잘 안 난다. 그건 송창식이나 윤형주한테 물어봐도 소용없다. 내가 분명 그네들보다 훨씬 앞서 쎄시봉 출입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다. 77세 노인이라는 무기로 오염된 기억의 예스터데이를 뻔뻔하게 써내려가는 거다.
 
친구 아버지 다방서 팝음악 심취
 
글쎄, 쎄시봉엘 내가 왜 갔을까. 추측은 몇 가지 남는다.
 
첫째 추측은 그때 다니던 대학과 교회에 대한 노골적인 반발이다. 나는 실제로 두 곳의 대학을 찔끔찔끔 다녔다. 한양음대 주최의 고교음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하는 바람에 당시 김연준 총장님으로부터 전액 장학생으로 스카우트되어 들어갔던 것이고, 잘 다니다가 2학년 초 1년 아래 못 말리게 예쁜 여학생과의 뜨거운 염문으로(당시 그 여학생은 약혼자가 있었다) 급기야는 자진 퇴학을 결정하고 벼락치기로 공부를 다시 해 서울음대에 들어갔던 터였다.
 

용문고 시절 트럼펫을 부는 조영남. [사진 조영남]

용문고 시절 트럼펫을 부는 조영남. [사진 조영남]

그런데 나한텐 대학을 다니는 게 총체적 난맥상으로 느껴졌다. 나는 고교성악 콩쿠르에서도 1등을 했고, 서울음대 재학생 오디션의 결과로 푸치니의 오페라 ‘쟌니 스키키’의 주인공을 맡아 당시 최고의 공연장인 광화문 소재 시민회관(지금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펼쳤을 만큼 촉망받는 성악가였는데 성악가의 최종 꿈인 오페라를 직접 해봤더니 어느 정도 계산이 섰다. 세계적인 성악가는 그만두고라도 두 가지 문제, 먹고 살 만큼의 돈벌이가 될 것이냐, 재미있을 것이냐 그게 문제였다. 헐! 당시의 사정은 이랬다. 전망이 무망. 바로 그거였다. 오페라를 해봐야 나의 똥자루같이 작은 체구와 바리톤(중음)으로는 ‘세빌리아의 이발사’나 ‘리골레토’ 정도뿐이라는 한계에 부딪힌다. 몇 달을 죽어라 연습해서 고작 하루 이틀 공연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 구조나 그에 대한 보수도 영 시원치 않을 것이라는 게 나를 암울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황홀한 고민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한양대학 때 만난 두 친구, 바이올린 전공의 이병훈(일찍 간경화로 죽었다)과 성악 전공의 변건호(나는 지금까지도 그를 똥건호라고 부른다. 지금 대구 근교에서 음악카페를 운영 중이다)와 의기투합 쎄시봉을 함께 찾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때도 나는 병훈이나 건호가 흥얼대는 서양 팝음악이 괜히 좋았다. 특히 건호 아버지는 종로 한복판에 그럴싸한 규모의 ‘향원’ 다방을 경영했기 때문에 우리는 수시로 거길 들어가 서양식 팝음악에 원 없이 심취했던 것이다.
 
학교에 대한 불만도 컸지만 교회에 대한 불만도 컸다. 나는 소위 모태신앙의 표본으로서 교회는 그냥 무조건 다녀야 하는 곳으로 알고 그냥 줄창 다녔다. 나는 지금도 가수 지망생들에게 교회에 다닐 것을 적극 권장하곤 한다. 왜냐하면 나는 교회에서 음악의 기초를 잘 다졌기 때문이다. 성가를 잘 소화하는 것은 노래하는 사람에겐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당시 나는 교회로부터 엑소더스(탈출)를 감행해야만 했다. 내 깐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다녔던 동대문 근처 동신교회에서 나는 같은 성가대원 출신의 이단열(성신여대 음대 교수가 됐다)과 트럼펫 이중주를 하게 됐었고, 같은 교회 성가대원이었던 경기여고를 다니는 여학생 동료에게 빌렸던 은빛 나는 보면대(악보를 펼치는 대) 두 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비가 많이 오는 날 보면대를 들고 탔던 버스에서 나는 트럼펫만 달랑 들고 내렸다. 믿거나 말거나 용문고교 밴드부 시절 나는 트럼펫 주자였다. 얼마 안 있어 교회에선 “조영남이 보면대 두 대를 팔아먹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나는 그 일로 교회를 뛰쳐나오며 “교회는 여기서 끝이다”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이런 교회에 대한 불만의 표출로 교회 대신 쎄시봉을 택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한가지 추측이 더 남는다.
 
서울음대 연극반에서 너새니얼 호손의 그 유명한 연극 ‘아워 타운’, 즉 ‘우리 읍네’라는 제목의 연극을 하면서 눈이 맞은 키가 훌쩍 큰 최시현과의 사랑의 도피처로 말로만 듣던 쎄시봉을 갔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 너저분한 세 가지 추측 중에 어느 게 맞는 건지는 나도 모른다.
 
쎄시봉은 종로 무교동 근처 공안과 병원 뒤편 골목에 있던 카바레 코파카바나와 스타더스트 사이 골목에 움푹 들어가 있던 평범한 음악감상실이었다.
 
쎄시봉은 프랑스어로, 영어로 치자면 ‘It’s so good’ 정도 되는 ‘괜찮아! 멋져’쯤 되는 의미다. 바로 이 쎄시봉이 그때 막 일기 시작한 소위 청년 문화의 산실이었다. 특히 청바지 세대의 선두주자였던 최인호(2013년 세상을 떠났다)가 머물렀던 장소다.
 
피아노 치며 부르자 열광적 찬사
 

쎄시봉 입구. [사진 한국대중가요연구소]

쎄시봉 입구. [사진 한국대중가요연구소]

쎄시봉 입구에 가면 우선 티켓 박스가 있고 티켓을 구해 문 앞에 서 있는 문지기 용출이한테 티켓을 주면 드디어 입장이 허락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조명이 좀 더 어둡고 왼쪽 몇 계단 높은 곳에 큼직한 LP판 부스가 있을 뿐 일반 다방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안내양이 자리를 안내하고 마실 것을 주문받는다. 음료를 받으면 아무 자리나 앉아 마지막 음악이 나올 때까지 죽치고 앉아 있어도 무방한 곳이다. 졸아도 상관없다. 떠들지만 않으면 오케이인 곳이다.
 
며칠을 다니다 보면 문지기 용출이의 경상도 사투리 섞인 중얼대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용출이는 정말 용출이처럼 생겼다. 마치 노영심이가 영심이처럼 생겼듯이 말이다.
 
“(경상도 사투리)아! 이거 상규 히야(형)가 새로 산 내 웃저고리를 갖다가 무교 여관에 팔아뿌렸다 아이가!”
 
그리고 또 한 가지, 소를 훔쳐서 파는(소도둑) 사람처럼 생기신 덩치 큰 쎄시봉 주인아저씨의 맨날 똑같은 레퍼토리. 이번엔 지독한 이북 사투리다.
 
“(이북 사투리)야, 갸들! 덩말 찡땅거리는구나. 야! 거 볼륨 좀 줄이라우! 볼륨 좀!”
 
이 소리는 지금까지도 이상벽이 내는 흉내가 압권이다.
 
그럼 나는 어찌하여 이 전설적인 쎄시봉에 정식 멤버가 될 수 있었나? 이름 없는 아마추어가 대뜸 쎄시봉 대표가수로 올라선 것은 아마도 내 경우가 최초였을 것이다. 그다음 한대수, 송창식, 윤형주쯤으로 이어졌을 것이지만 말이다.
 

쎄시봉의 신청곡 용지. [사진 한국대중가요연구소]

쎄시봉의 신청곡 용지. [사진 한국대중가요연구소]

이때의 얘기도 말하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래서 나는 쎄시봉의 터줏대감 이상벽의 증언을 따르고 있다. 모종의 음악 이벤트가 있던 날인데 엘비스 프레슬리의 ‘Anything that’s part of you(낙엽따라 가버린 사랑)’를 번안해서 대히트한 차중락 선배(몇 년 못 살고 세상을 떠나셨다)가 약속시간에 나타나질 않자 급한 김에 쎄시봉 위아래로 앉아 있는 관객에게 아무나 나와서 노래하라고 했는데 머리 덥수룩하고 끔찍이도 못생긴 풍모의 청년이 올라와(쎄시봉은 계단 몇 개의 위층 아래층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피아노를 직접 치며 노래 한 곡 불렀는데 그게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물론 그건 나 조영남이었고 내 생각엔 같이 앉아 있던 병훈이나 똥건호 아니면 최시현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나가라고 부추겼을 것 같다. 희미한 기억으로는 얼결에 떠밀려 무대에 올라서게 된 나는 거기에 있던 피아노를 치면서 평소에 배워두었던 미국 컨트리송 ‘Don’t worry about me(내 걱정 말아요)’를 불렀고 그게 열광적인 찬사를 받아낸 거다. 대박 난 거다.
 
그날 즉시 주인아저씨가 “야! 나오라우! 밥 먹으러 가자우!” 해서 나는 일약 정식 쎄시봉 멤버로 군림하게 된 거다. 주인아저씨의 “야! 나오라우!”가 입장권 안 내고 프리패스하는 특별 멤버가 되는 ‘싸인’이었다.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한대수 등이 그런 식으로 “야! 나오라우”의 멤버가 됐을 것이다. 어느 날 주인아저씨가 사주셨던 골목집 비지찌개에서 나는 모처럼 왕건이를 발견해 얼른 입에 넣어 씹었는데 헐! 그건 고기가 아니라 된장 뭉치였던 것이다. 그 기억만은 또렷이 남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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