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현 상황에서 ‘고난의 신학’이 주는 2가지 시사점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1. 그동안 죄와 허물로 하나님께 징계받고 있다
2. 한국교회에 대한 정부의 핍박이 도를 넘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 2020년 성탄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지난해 12월 25일 비대면 성탄 축하예배 모습. ⓒ크투 DB

어느 누구도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고통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다. 고난과 고통은 누구라도 피하고 싶고, 경험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고, 당할 수 밖에 없다.

인생의 세계에 고난과 고통이 온 것은 죄로 인한 것이었다. 죄가 없었다면 고난과 고통도 없었을 것이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인간은 고난과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창 3:18), 여성들은 임신하는고통이 크게 더해지고(창 3:16), 남성들은 평생에 땀을 흘려 수고해야 하는(창 3:17, 19) 등 고통과 고난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죄는 사람의 본성을 부패하게 하여 살인과 폭력과 미움과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죄로 인하여 온갖 질병이 이 세상에 들어옴으로 사람들은 질병에 의한 고통으로 힘들어 한다. 죄는 인간의 관계에 치명적인 해악을 미쳐서, 인생은 서로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마침내 인간은 육신적인 죽음을 경험하고 이어서 영원한 죽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고통과 고난의 종과 노예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영원한 사망의 정죄 아래 있던 우리들이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거듭나고 중생한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다. 우리 영혼이 다시 살아났다 해서 고난이 사라지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경험해야 할 고난은 여전히 남아 있다.

물론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가 고난당했던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우리는 고난을 경험한다. 고난을 매개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숙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가게 된다.

그렇더라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고난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달라지고, 고난의 의미를 우리는 더욱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믿게 된 후 우리에게 나타나는 중대한 변화는 고난과 고통이 반드시 죄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요셉, 욥, 그리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산 사람이라도, 고난과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즉 죄와 무관한 고통, 죄와 관계없는 고난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 주님의 나라와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는 신실한 성도들의 삶이 말할 수 없는 고난으로 점철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

심지어 주님을 위하여 온전히 희생적으로 섬긴 믿음의 사람들이 순교로 그들의 인생을 마감하는 것을 본다. 언뜻 보면 부조리하게 보이는 이 현실이 사실상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서 허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7절에서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사람들에게 고난은 어떤 선택안이 아니라 필수 코스임을 명확하게 확인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과거 우리가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 경험했던 고통과 고난은 우리 죄로 인한 것이었지만, 이제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받아들인 이후에는 죄와 무관한 고난의 쓴 잔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범죄와 실수로 말미암아 고통과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우리의 범죄와 실수에 대해 하나님이 사랑으로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도 영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하지만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준비된 고난은 주를 위하여 의롭게 살고, 신실하게 섬기다가 당하는 핍박, 박해, 혐오, 치욕을 뜻한다. 그러하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피하는 자들이 아니라, 고난을 이기고 극복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고난은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 우리의 교만을 꺾고, 우리의 모난 성품을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바꾸며, 자신을 신뢰하던 우리가 주님만을 신뢰하게 하며, 죄를 따라가던 우리에게 의의 열매가 맺어지게 한다.

또한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한다. 그러하기에 고난 자체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고난은 우리의 삶과 인격을 더욱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도구임이 분명하다.

고난의 신학은 한국교회의 현재 상황에 대해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첫째, 우리 한국교회는 우리가 그동안 범했던 죄와 허물에 대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는 분석이다.

하나님보다 어떤 특정한 인간이나 재물을 섬겨왔던 우상숭배의 죄, 번영주의, 율법주의, 그리고 방종주의 같은 거짓 복음을 교회 내로 들여온 죄, 교회의 내면적 본질보다는 외면적 성장과 교회당 건축을 중시했던 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한 나눔을 경시했던 죄 등등에 대해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징계하고 계신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경험하고 있다. ‘개독교’라는 이름을 들은지 오래 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정통 교회와 신천지 같은 이단의 차이점에 대해 전혀 구별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한동안 신천지 집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언론들이 이제는 신천지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단의 잘못을 교회에 뒤집어 씌우고 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의 죄악과 허물에 대하여 통렬하게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을 잘 감내하고 연달하여 새로운 차원의 영적 성숙을 경험해야 한다.

둘째, 우리 한국교회에 대한 정부의 핍박이 도를 넘었다는 사실이다.

코로나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한국교회에 대하여 취하고 있는 정책은 노골적인 종교 박해, 교회 박해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정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코로나 방역’이 아니라 “기독교 방역’ 또는 ‘교회 방역’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장을 막겠다는 정책이 아니라, ‘기독교 바이러스, 교회 바이러스, 복음 바이러스’의 확장을 막겠다는 반기독교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의 잘못괴 실수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99%가 넘는 거의 모든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은 철저하게 방역지침을 지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교회 좌석 수의 몇퍼센트만 예배를 허용하겠다는 졸속 정책은 그야말로 특정 종교에 대한 부당한 박해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비둘기 같은 순결함과 뱀같은 지혜(마 10:16)로 무장해야 한다. 그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딛 2:12) 행동해야 한다.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의 빌미를 주어서도 안 된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거룩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정부의 부당한 정책에 대해 구체적인 반대 목소리를 내고, 정부 당국자와의 만남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교회를 핍박하는 세력은 이미지 전략과 프레임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미 여러 차원에서 한국교회는 이미지 전쟁과 프레임 전쟁에서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가 다 잘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에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와 부당한 프레임만은 반드시 걷어내야 한다.

이 부당한 이미지와 프레임 때문에 어느덧 한국교회는 혐오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거룩한 중지를 모아야 할 때이다.





정성욱

▲정성욱 교수.

정성욱 박사
美 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저서 , , , , , , , ,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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