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두려움과 떨림’은 구원의 확신을 약화시키는가?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신(am convinced)’과 ‘두려움(fear)’을 동시에 권면한다. 대표적인 것이 다음의 두 구절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그러나 대개 이 둘을 동시에 수용될 수 없는 것처럼 여긴다.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사 둘 다 인정하는 경우에도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조심’에 경도돼 ‘확신’이 약화되거나, ‘확신’에 경도돼 ‘조심’약화되거나 한다.

예컨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을 붙들면, “확신하노니…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는 말씀은 희미해지고, 혹은 또 그 반대의 경우로 된다.

그러나 이는 이 말씀들에 대한 피상적 이해에서 온 결과이다. 특별히 ‘두려움’의 진의를 파악한다면, 그것은 죄의 덫, 올무, 위험이 많은 세상에서 ‘구원의 확신’을 구가하게 하는 ‘은혜’임을 알 수 있다.

◈두려움의 속성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우리의 구원이 ‘불완전’하거나,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유리그릇’ 같아 벌벌 떨며 조심해 다루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두려움과 떨림’의 뿌리는 정죄에 기반한 율법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구원받은 자의 ‘여유로움에서 오는 조심(be careful)’이라 함이 옳다. 비유컨대 아빠가 유약한 아들의 손을 잡고 낭떠러지 가장자리를 걸어가면서, ‘아빠 손 놓지 마. 놓으면 떨어져 죽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아이는 아빠의 강한 손에 붙들려 있기에, 설사 아이가 부주의하여 아빠 손을 놓는 경우에도 낭떠러지에 떨어질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아빠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린 자식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습관적으로 내뱉는 일종의 ‘경고음(warning horn)’ 같은 것이다. 아빠는 그곳을 통과하는 동안 그에게 쉬임없이 그것을 들려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두렵고 떨림’을 요구하는 것은 덫과 올무가 즐비한, 세상이라는 험지를 통과하는 유약한 성도들을 각성시키려고 내는 천부의 ‘경고음(warning horn)’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기울이는 ‘조심과 노력’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라는 큰 그림 안에선 미미한 작은 붓질(minute painting)에 불과하다. 그의 ‘조심’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큰 그림을 완성시킬 수 없을 뿐더러, 반대로 그의 실수가 그것을 망가뜨리지도 못한다.

유능한 화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몇 번 붓질을 잘못했다 해서 그림을 망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교한 덧칠을 통해 오히려 예상 밖의 수작(秀作)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위대하신 화가인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라는 그림에 잘못된 붓질(painting)을 했어도 정교한 그의 덧칠로 그것을 말끔하게 완성하실 것이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말씀의 경우에도, 그 ‘넘어짐’ 이 구원을 망쳐버리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성도의 넘어짐’이 ‘하나님이 붙든 손길 안’에서 된 것이기에 그로 하여금 ‘아주 엎드러’지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시 37:24).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0.1mm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물리학이나 수학의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무리하고 억지스러운 셈법을 고안하기도 한다.

과거 총신대학원 모 교수가 ‘구원은 백 퍼센테이지(percentage) 하나님의 주권’이고, ‘백 퍼센테이지(percentage) 인간의 책임’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것도 그런 관점의 반영이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조화시켜 보려는 고육지책에서 나온 묘책(?)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변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의 변수(variable, 變數)’와 항상 ‘일정한 값’을 취하는 불변의 ‘하나님의 상수(constant, 常數)’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조심이나 노력은 그것이 아무리 가상해도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라는 ‘불변의 상수(constant, 常數)’ 안에서 작동되는 ‘미미한 변수(variable, 變數)’일 뿐이다.

‘변수’가 ‘상수’를 변개시킬 수 없다. 예컨대,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라는 큰 그림 안의 ‘미미한 작은 붓질(minute painting)’에 불과하다.

◈‘조심’은 ‘구원의 확신’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물고기의 자유는 물 가운데 있을 때만 보장된다’는 속담처럼, 무한정의 자유에 적절한 제한이 가해질 때 오히려 자유가 안정감을 장착한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운동장에 ‘울타리’가 있는 게 아이들을 자유롭게 할까? 아니면 없는 게 자유롭게 할까?’라는 실험을 했을 때, 그 답은 전자였다고 한다.

‘울타리’가 없는 경우 아이들이 불안감 속에서 자유롭게 뛰놀지 못하고 삼삼오오 이곳저곳에 웅크리고 있었던 반면, 그것이 있는 경우 아이들이 운동장을 종횡무진하며 마음껏 뛰어다녔다. 이는 ‘적절한 제한’이 자유를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자유’란 무한대의 허용을 보장받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 논리대로라면, ‘조심의 제한’이 ‘구원의 확신’을 저해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것이 안정감 있게 ‘구원의 확신’을 누릴 수 있게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여기서 ‘자유’를 ‘구원의 확신’과 동일시한 것은 율법에서의 ‘자유’가 ‘구원의 확신’을 낳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 ‘구원이 무산될까봐’ 불안해서 나온 것이 아닌, ‘구원의 보감(확신)’이 주는 ‘포만감’에서 나온 여유이기에, 둘은 배치되지 않는다. 곧, 귀한 구원을 받고 보니 너무 좋아, 그것을 소중히 여기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누가 수백억 짜리 다이아몬드를 몸에 지니고 있다면, 단 한 순간이라도 그것에 대해 경계심을 떨칠 수 있겠는가?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성경적으로 표현하면 ‘두렵고 떨림’이다) 끊임없이 그것을 의식하며, ‘안전한가?’ 확인하고 또 확인할 것이다.

하물며 측량할 수 없는 어린양의 보배로운 피로 얻은 구원에 대해선 얼마나 그러겠는가? 어찌 그것에 대해 한 순간이라도 무심한 채로 지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구원을 소중히 여겨 ‘조심’하니 ‘구원의 확신’이 더해지는 선순환(virtuous circle, 善循環)이 이뤄진다. 곧 매 순간 ‘어린 양의 구원’을 의식하니,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져(롬 5:5)’ ‘구원의 확신(살전 1:5)’이 더해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에 대해 잘못 생각한다. 모두(冒頭)에 말했듯, ‘조심’과 ‘구원의 확신’은 서로 배치된다거나, 아니면 ‘구원’에 대해 무심한 채 살아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저절로 그것을 누리게 된다고 생각한다.

‘구원’에 무관심한 자에게 ‘구원의 확신’이란 없다. ‘구원의 확신’을 갖기를 원하는가?

당신이 받은 ‘어린 양 그리스도의 구원’이 얼마나 엄청난 것임을 생각하고, 콩닥거리는 마음으로(두려움과 떨림으로)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라. 그러면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의 확신’으로 부어질 것이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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