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예수 신앙’의 실체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어리석은 자의 신앙

정통 신앙인으로 자처하는 기독교인들 중에도, 그들의 신앙이 생득적(生得的)인 종교성, 신념, 지성주의, 윤리주의 누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제대로 된 성경적 신앙은 반(反)생득적이고 반(反)종교적인, 신적(divine) 연원을 갖는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신적 속성(divine attributes)’을 표현한 것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는 말씀이 아닌가 싶다.

한 마디로 그것은 생득적인 종교 관념이나 상식으로는 상상해 낼 수 없는,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성경적인 ‘예수(복음) 신앙’을 받아들이려면 생득적인 종교 관념, 상식, 선입견을 버리고 백지상태가 될 것을 요구받는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세상의 ‘미련한 자들’에게 나타내시고(고전 1:26-29)”.

여기서 ‘어린 아이’, ‘미련한 자’는 선입견을 가질 수 없을 만큼 ‘백지 상태’의 사람 아니면, 많은 지식과 상식을 가졌어도 그것들을 다 ‘복음의 가르침’ 앞에 복종시키는(고후 10:5) ‘순진무구한(simple) 사람’이라는 뜻일 게다.

사실 ‘창조, 타락, 성육신, 십자가 구속, 승천, 성령 강림, 거듭남, 믿음, 재림, 천국과 지옥’ 같은 기독교 핵심 교리들 중 그 어느 것 하나 ‘인간 지성’으로 수납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점에서 ‘예수(복음) 신앙’은 사람의 지성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지성에 저항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반지성적(anti-intellectual, 反知性的)이라는 뜻이 아니다. 본성적으로 복음을 대적하는 전적 타락한 인간 지성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는 의미다.

이 점에선 ‘이성(理性)의 무용론(無用論)’과 ‘유해론(有害論)’을 주장한 터툴리안(Tertullianus, 155-240), 루터(Martin Luther), 그리고 ‘어리석은 자의 기독교’를 말한 칼빈(John Calvin)이 큰 틀에서 일치한다.

‘믿음’은 ‘복음’을 통한 ‘성령의 가르침’의 산물이다. 이는 신비주의자들의 직통계시 같은 것을 말함이 아니다. 복음을 들을 때, 그것이 믿어지도록 가르치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말한다.

복음은 ‘교과서(text)’이고, 성령은 그것의 ‘교사’이다. 교사인 ‘성령’ 없이 교과서(복음)을 가르칠 수 없고, 교과서인 ‘복음’ 없이 교사(성령)이 가르칠 수 없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는 말씀은 ‘복음을 들을 때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믿음이 발생한다’는 뜻이다.

‘복음을 듣는 일’ 없이 믿음의 발생은 절대 불가능하다. 만일 누가 ‘복음을 듣는 일’ 없이 이런 저런 동기로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이라 할 수 없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성령의 증거’는 개인의 능력 여부를 불문에 붙이고 전도에 담력을 갖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언변도 영적 파워도 없어, 자기 말을 듣고는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는 공연한 걱정이며, 오히려 불신앙이기까지 하다. 언제 어디서든, 누가 ‘복음’을 말하면 성령은 나 몰라라 하고 가만히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 있는 ‘성령’은 반드시 그곳에 현현하여 전도자가 외치는 ‘복음’에 대해 증거 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이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복음에 따른 성령의 증거’는 ‘복음 경륜’이 공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업(協業)’이라는 사실에서도 필연성이 요구된다. ‘복음’은 ‘성부’에 의해 전체 경륜되고(롬 1:2) ‘성자’에 의해 성취되고(막 1:1) ‘성령’에 의해 증거 된다(요 15:26).

복음 전도자는 이처럼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반드시 ‘성령의 증거’가 따른다는 것을 믿고 두려움 없이 전해야 한다.

◈구속 신앙

‘예수 신앙’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유일한 계시’이다. 이는 ‘예수 신앙’ 자체에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을 ‘통로로’ ‘하나님 인식’에 이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 신앙을 통한 하나님 인식’은 ‘믿고 안다’ 혹은, ‘알기 위해 믿는다(crede ut intelligam)’는 소위 ‘신앙 인식론(Augustine)’과는 결을 달리한다.

(사실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의 ‘신앙인식론’은 공격자들로부터 “하나님이 있다고 믿으니 있고 없다고 믿으면 없으니, 결국 기독교 신앙도 ‘사변적인 신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는 누명을 받아왔다).

‘예수 신앙이 하나님 인식의 통로’라고 했을 때의 ‘하나님 인식’은, 정확히 말하면 ‘구속론적(救贖論的)인 하나님 인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어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가로막은 죄가 철거되니, 그 동안 안보이던 하나님을 보게 됐다는 말이다.

이는 실존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화목)’이며, 단지 의식 속에서 이뤄진 ‘관념적인 하나님 인식 획득’과는 구분된다. 이러한 ‘구속론적 하나님 인식’은 ‘기독교 신앙이 사변적 신앙’이라는 모함을 받을 여지를 없애 준다.

그리고 이 ‘예수 신앙’을 통한 ‘구속론적 하나님 인식’은 하나님의 어느 ‘한 위(位)의 인식’으로 멈추지 않고, 곧장 ‘완전한 삼위일체 하나님 인식’에로 이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인 동시에 ‘완전한 계시의 도달점’이기 때문이다(요 10:30; 14:9).

유대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 인식’에 실패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부인하므로 ‘구속론적 하나님 인식’에 이르지 못한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영접하는 순간 그 ‘한 위(位)’만 영접하지 않고 ‘완전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접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그와 일체이신 ‘성부’, ‘성령’을 영접하는 데는 시간차가 없다(요 7:39; 10:30, 갈 3:14). 삼위(三位)의 일체적이고 동시적인 영접이다.

프레드 샌더스(Fred Sanders)가 그의 저서 ‘The Deep Things of God’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고 했는데, 이는 ‘복음’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이 사람 되어 죽으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확연히 계시됐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사람 되어 죽지 않았다면 ‘복음’이 성취될 수 없었고, 나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삼위일체’도 계시되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 역시 유대인들처럼 여전히 오리무중의 하나님을 찾아 헤메다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다(요 8:21).

◈실존적 신앙

성경은 ‘믿음’을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 정의했다. 이 정의에 근거해 “믿음으로 하나님이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을 안다(히 11:3)”고 했다. 눈으로 보지 못했던 ‘말씀으로 말미암은 천지창조(요 1:3)’를 ‘믿음’으로 알게 했다는 뜻이다.

이는 ‘기독교의 신앙’이 ‘관념’이 아닌, ‘하나님이 행하신 실재’에 기원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 역시 ‘영원부터 영원까지(느 9:5), 스스로 계시는(출 3:14)’ 하나님의 실존에 기반한다.

‘배가 고픈 것은 배고픔을 채워줄 음식이 있기 때문’이고,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은 이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실존적 논증(existential reasoning)’처럼,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에 대한 신앙도 갈망도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선 기독교 신앙 역시 ‘실존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관념’에 기반을 둔 ‘관념적 신앙(conceptual faith)’은 ‘실재(existence)’를 중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의 존재’ 여부는 그리 중요치 않다. 그들에게는 ‘실재(existence)’보다 ‘관념(concept)’이 더 중요하다.

오히려 그들은 ‘관념’으로 ‘실재’를 만든다. 이들의 종교에선 ‘관념’이 ‘본질적 속성’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관념’에 의해 창조된 ‘상상 속의 신(an imaginary god)’일 뿐이다(이는 그들이 무신론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실존’이 우리 ‘존재와 신앙의 뿌리’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도, ‘하나님 신앙’도 다 거기서 나온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그것들도 없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행 3:16)”이라는 말씀은 ‘기독교 신앙’이 ‘예수라는 실존’위에 기반 했음을 알려준다.

이미 ‘유신론적 신앙’을 가진 우리들에겐 이런 설명이 불필요하지만, 이제껏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실재 위에 세워진 예수 신앙’과 ‘의식 위에 세워진 관념적 신앙’의 차이를 말하기 위함이다.

‘예수 신앙’은 ‘실존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한 ‘경륜’이다. 영원 전부터 자존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기 위해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이다.

‘관념’은 ‘실재’ 없이도 가능하지만, ‘믿음’은 ‘실재’ 없인 불가능하다. ‘믿음’이 ‘관념’에 의해 정의될 순 있지만, ‘믿음’을 ‘관념’으로 대체할 순 없다. ‘믿음’의 뿌리에는 ‘3위일체 하나님’이 있지만 ‘관념’의 뿌리에는 ‘인간 의식’이 있을 뿐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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