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구원도 은혜로, 성화도 은혜로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부모가 자식을 훈육할 때 해선 안 될 말이 있다. “말 안들으면 내다 버린다!”, “부자의 인연을 끊는다” 같은 말이다.

정말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런 말을 해선 안 된다. 우리의 천부(天父)께서도 ‘아무리 속 썩이는 자식’이라 하더라도,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런 막말은 안 하신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이들 중에 “하나님이 구원에서 탈락시킨다”는 말을 다반사로 하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엄혹한 ‘율법주의 어법’이지, ‘기독교 어법’은 아니다.

물론 때론 하나님이 “어찌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사 1:5)”는 과격한 말도 하시지만, 그것은 그들을 저주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품기 위해서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도 그의 자녀들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심판 때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동안 감춰졌던 ‘진·가(眞·假)’가 드러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에게서 부족한 점이 발견되더라도, 가라지라 치부해 내치지 않으신다.

이는 ‘가라지(불택자)’를 회개시켜 ‘알곡’으로 만들자는 취지는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가라지’에 대해 그런 의도를 갖지 않으셨다. ‘가라지’는 근본 다른 종자이기에 ‘알곡’으로 변모될 가능성은 없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 자녀들을 경성시키기 위한 ‘어법’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화(sanctification, 聖化)’에 반(反)은혜적인 ‘율법주의 어법’을 채용하지 않는다. 공포심을 유발하는 그런 반(反)은혜적인 어법으론 성경이 말하는 ‘근원적인 변화’를 일구어낼 수 없다.

물론 종종 그것이 외형적인 변모를 도출해낼 수 있을지 모르나(이단들의 경건과 열심히 그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성화의 진작’이라기보단 비정상적 변태(變態)이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 교수의 말에 의하면, ‘탕자에서 바리새인으로의 변화’이다.

그러한 것은 오히려 장기적으로 ‘은혜의 부르심’으로 성취되는 ‘구원 경륜’을 훼방하며, 사람들에게서 ‘구원의 확신’을 뺏고 그들을 좌절과 무능에 빠뜨린다. 이는 그가 ‘어떻게’, ‘어느 정도’의 열심을 내야 구원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구원’을 ‘전적 은혜(utter grace)’에 의존시키지 않고 조금이라도 인간에게 여지(餘地)를 돌릴 때, 자신을 ‘율법 아래’ 가두고 심판을 불러온다. 죄인에게는 ‘은혜’ 외에는 달리 ‘구원 얻을 경륜’이 없고, ‘은혜를 의지’하는 일 외 ‘자기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구원’이 은혜로 됐듯, ‘성화(sanctification, 聖化)’도 은혜로 된다. ‘구원은 은혜로 받고, 성화는 행위로 되는 것’은 모순이다. ‘성화는 성화를 도모’할 뿐, ‘구원을 도모’하지 않는다.

비유컨대, 감기에 걸렸다면 ‘감기약을 처방’하면 되지, 생사를 가를 ‘극약 처방’을 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성화’를 진작시키려면 ‘성화’의 처방을 내면 되지, 그것의 원천인 ‘칭의(구원)’에까지 손을 댈 필요가 없다.

‘성화’로 ‘칭의(구원)’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것은 ‘마차가 말을 끌려는 것(Put the cart before the horse)’이나, ‘꼬리가 몸통을 흔들려는 것(Wag the dog)’처럼 주제넘은 일이다.

사람들은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안다(눅 6:44)’는 말씀을 ‘성화의 결핍은 칭의의 결핍이다’ 혹은 ‘성화의 충분은 칭의의 충분이다’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옳은 해석이 아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가 이스라엘이다.

그들은 극상품 포도나무 종자(the choicest vine)였지만, 들포도(worthless ones)를 맺었다(사 5:1-4). 이스라엘뿐이겠는가? 오늘 우리 역시 종자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DNA’를 가진 ‘극상품’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걸 맞는 열매를 맺지 못해 늘 좌절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농부이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즉각 뽑아내질 않으셨다. 과원지기 예수님의 중재로 한 해, 한 해 그것을 유예(猶豫)해 주셨다(눅 13:7-9). 우리 모두 그렇게 하여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은혜이다. 그렇지 않다고 할 이 있는가?

◈은혜, 성화의 동력

죄인은 ‘자력’으로는 설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선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할 때만 하나님이 그 안에서 역사하여 그를 세우신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은혜’가 그 안에서 역사하시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그는 ‘무능’해지고 ‘성화의 진작’도 불가능해진다. 성경도 분명히 ‘두려움으로서’가 아닌, ‘은혜로 열매 맺는다(골 1:6)’고 했다. ‘두려움’은 ‘성화의 동력인 사랑(요일 4:18)’을 이루지 못해 ‘성화’를 불가능하게 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성화의 최고봉’인 ‘그리스도가 주인 된 삶’ 역시 ‘두려움’이 아닌 ‘사랑의 강권’으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독재자는 ‘공포정치의 효용성’에 길들여진 사람이다. 이는 단 시간 내에 기대하는 바를 얻어낼 수 있고, 국민을 자기 입맛대로 이끌고 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효용성의 매력’이 독재자들로 하여금 영원히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게 하므로 끝까지 독재자로 살게 하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체벌(體罰)’만큼 즉효를 내는 것이 없다. 부모가 원하는 결과를 신속하게 안겨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길들여지면, 비용이 많이 들고 인내심을 요하는 다른 ‘교육 방법’은 눈에 안 들어온다.

‘성화’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생각이 비슷한 것 같다. 죄인에게 ‘은혜와 사랑’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영(令)이 서지 않을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약발(efficacy of medicine)’을 잘 받는 ‘율법주의 방식’을 채용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께는 ‘느리고 빠름’에 크게 관심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것들의 ‘허상’을 경계시킨다.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전 9:11)”.

경험 많고, 환자를 사랑하는 의사는 환자들에게 가능한 ‘센 약(strong medicine)’을 처방해주질 않는다. ‘병의 악화’를 막기 위해 ‘최소한의 처방(weak medicine)’만으로 그치고, 몸이 스스로 병을 이길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러나 이런 처방은 약효가 금방 나타나지 않기에 환자들에게는 인기가 없고, 그런 처방을 해 주는 의사도 유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방약(miracle drug)’을 처방해줄 유능한(?) 의사를 찾으며, 그런 의사를 만나면 ‘허준’이 여기 있다고 파다하게 입소문을 낸다.

그러나 사실 ‘단방약’이란 없다. ‘센 약’만 있을 뿐이다. ‘센 약’좋아하다가 약의 내성(耐性)으로 웬만한 약으론 자신의 병이 듣질 않게 된 것을 안후에라야, 사람들은 비로소 ‘빠른 치료’가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성화’에 있어서도, 사람들은 ‘센 약’의 환상(?)을 갖고 ‘율법주의’ 뭉둥이로 사람들을 겁박하면, 금방 뭔가 성과를 낼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그것을 즐겨 차용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대대로 외적인 변모를 목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 ‘은혜’로 되지 않은 것은 ‘탕자에서 바리새인으로’의 변화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왜곡된 결과물의 영향이 장기적으론 신앙 자체를 왜곡시키고 정상적인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한다.

반면 ‘은혜의 방식’으로 되는 ‘성화’는 속도를 감지하지 못할 만큼 더딜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 경륜’이 본디 그렇다(창세 전에 작정된 은혜가 우리에게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가를 안다면, 이 역시 결코 느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천천히 돌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듯 ‘은혜의 수례바퀴’는 더디 돌지만 반드시 ‘성화’를 이룬다. 물론 이 땅에선 그것의 ‘완전한 완성(absolute completion)’을 보지 못하지만 말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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