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박노식에 쫓긴 합죽이 김희갑 “영균아, 나 좀 살려줘”


김수용 감독의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1970)에서 주연한 김희갑과 황정순 콤비. 배우 신영균이 제작한 유일한 영화다. [중앙포토]

김수용 감독의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1970)에서 주연한 김희갑과 황정순 콤비. 배우 신영균이 제작한 유일한 영화다. [중앙포토]

평소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성격이다. 내 아내는 “두들긴 돌다리도 또 한 번 두들기는 사람”이라며 놀리곤 한다. 그만큼 매사에 신중한 편이다. 한창때 “영화로 번 돈을 왜 영화에 쓰지 않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연기에만 집중했다. 김승호·김진규·최무룡·신성일 등 선·후배 배우들이 영화를 제작했다가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61)
‘약방의 감초’ 김희갑

서민들의 애환 대변한 코미디언
‘저것이 서울의 하늘…’ 공동 제작
정부 실세 찾아가 “개봉 도와달라”
한국 근대화 다룬 ‘팔도강산’ 인기

나도 딱 한 번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김수용 감독의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1970)다. 1970년 일본 오사카 만국박람회가 배경으로,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엑스포70 재일한국인 후원회’가 제작 지원을 했다. 외부 후원을 받게 됐으니 크게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김희갑과 공동 투자를 했다. 황정순·윤정희·사미자·박암·이순재 등 동료들도 흔쾌히 출연했다.  
 

이 영화는 김 노인(김희갑)이 일본에 사는 아들(나)의 초청으로 오사카 엑스포를 구경 왔다가 도쿄에서 한식점을 하는 황 여사(황정순)에게 정을 느껴 서로 돕게 된다는 줄거리다. 재일 한국인학교에서 2세 교육을 하는 황 여사의 딸 희자(윤정희)가 조총련의 방해로 정상 수업을 못 하게 되자, 한국에서 학교를 돕는 모금운동을 펼친다.  
 
촬영·편집은 마쳤는데 문제는 극장을 잡는 일이었다. 1년에 150~200편씩 쏟아지는데 서울에 있는 개봉관은 10곳 남짓이라 극장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김희갑과 함께 국도극장을 찾아갔다. 당시 국도극장은 누구나 탐내는 곳이었고, 게다가 추석 명절 대목이라 경쟁이 치열했다. 어렵게 문을 두드렸으나 “오래전부터 예약이 꽉 차 있어서 안 된다”는 대답만 들고 돌아왔다.  
 
나름 야심 차게 준비한 작품인데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김희갑이 해결사로 나섰다. “내가 잘 아는 정부 실세에게 부탁을 해보겠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예정된 다른 영화를 취소시키면서까지 상영일을 잡았다. 하지만 국도극장 사장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어느 날 나와 김희갑을 사장실로 불렀다.  
 
내 극장 없는 설움 가슴 속에 새겨 
 

영화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의 김희갑과 신영균.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영화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의 김희갑과 신영균.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내가 안 된다고 했는데 뒤에서 힘을 써? 앞으로 신영균·김희갑 나오는 영화는 절대 내 극장에 안 걸테니 그리 알아.”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았다. 김희갑과 함께 선물 보따리를 사들고 사장실을 다시 찾아가 사과해야 했다. 마무리는 잘 됐지만 “내 극장이 없어 이런 설움을 겪는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나만의 영화관을 가져야겠다는 꿈이 간절해졌고, 77년 마침내 명보극장을 인수하게 됐다.  
 
어렵사리 개봉은 했지만 그간 들인 노력에 비해 영화는 흥행하지 못했다. 당시엔 정부 허가를 받은 제작사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는데, 나와 김희갑이 다른 영화사 이름을 빌린 사실까지 알려져 벌금까지 물었다. 이른바 ‘대명제작’으로, 적발되면 벌금 200만원을 내야 했다. 60년 스크린 인생의 작은 흠집이지만, 돌아보니 이 또한 삶의 자산이자 소중한 추억이 된 것 같다.  
 
김희갑은 서민의 애환을 대변한 코미디언이다. 볼을 쏙 움츠리는 연기로 별명이 ‘합죽이’였다. 약방의 감초처럼 출연작만 700여 편에 이른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서울의 지붕 밑’ ‘연산군’ ‘빨간 마후라’ 등 나와 많은 작품에서 손발을 맞췄다. 60년대 가족영화 ‘팔도강산’(1967)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팔도강산’은 슬하에 1남 6녀를 둔 한의사 노부부(김희갑·황정순)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사는 아들과 딸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얘기다. 바쁜 자식들 대신 부모가 여기저기를 돌며 겪는 가족 간 사랑과 애환을 다뤘다. 김승호·김진규·최은희·이민자·박노식·고은아·허장강 등 당대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대거 출연했고, 나는 여섯째 사위를 맡았다.
 
‘팔도강산’은 60년대 근대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공보부 산하 국립영화제작소가 참여했다. 전국 명승고적과 산업현장을 보여주는 계몽영화인데, 끈끈한 가족애 덕분에 일반인의 호응이 컸다.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32만6000여 관객을 기록했다. 60년대 영화 중 ‘미워도 다시 한번’ ‘성춘향’에 이은 세 번째 흥행작이다. 가수 최희준이 부른 영화 주제가 ‘팔도강산 좋을시고 딸을 찾아 백릿길. (중략) 잘 살고 못 사는 게 마음먹기 달렸더라’를 기억하는 올드팬들도 많을 것이다.
 
미국·브라질·우간다 등 9개국 촬영 
 

‘팔도강산’이다. 오른쪽 세 번째가 배우 박노식.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팔도강산’이다. 오른쪽 세 번째가 배우 박노식.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영화는 이듬해 속편도 제작됐다. 세계 곳곳에서 조국을 위해 일하는 가족을 찾아다니는 ‘속 팔도강산’이다. 5개월간 일본·미국·브라질·서독·프랑스·네덜란드·이스라엘·우간다·베트남 9개국을 돌며 찍었다. 해외여행을 극도로 제한한 시절, 컬러 시네마스코프 화면 또한 흥행에 한몫했다.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배우 박준규의 부친인 박노식은 브라질에 사는 둘째 사위 역이었다. 촬영 중간 호텔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김희갑이 내 방으로 뛰쳐 들어와 “좀 살려달라”고 외쳤다. 액션 스타 박노식은 술을 마시면 간혹 객기를 부리곤 했는데 그날 김희갑이 타깃이 된 모양이다. 김희갑은 박노식이 나만큼은 만만히 보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레슬링으로 다져온 내가 아닌가. 하여튼 그날 소동은 조용하게 마무리됐다.  
 
‘팔도강산’은 시리즈로 이어졌다. ‘내일의 팔도강산’(1971) ‘우리의 팔도강산’(1972) ‘아름다운 팔도강산(1972)’ 등이 잇따랐다. 김희갑 또한 각종 영화제 상을 휩쓸었다. 나와 김희갑은 예전 배우 중 재산을 좀 모은 편이다.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가 성공했다면 다시 제작에 손을 댔을까. 지금도 자신할 수 없는 일이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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