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정동길 거닐면 마주하는 이들… ‘아, 우크라이나’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53일째인 17일

우크라이나인들, 러시아대사관 앞 8번째 집회

“지치지만 전쟁은 익숙해지기 어려운 고통”

우크라이나 전쟁 53일차인 17일, 어김없이 한국에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대사관 앞에 모여 러시아의 민간인
학살을 규탄했다. 이들은 각국의 러시아와 거래 중단,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등을 촉구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따스한 봄날 주말인 17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돌담길은 옛 정취를 느끼며 가족, 연인과 걷기 좋은 코스다. 하지만 한국에서 주부 생활 15년차인 크리스티나 마이단추크 씨(35)는 매주 주말 남편과 이곳에 오면서도 고즈넉한 풍경을 즐길 여유가 없다.

크리스티나 씨는 올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주말마다 중구 주한 러시아대사관 앞에 모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한다. 이날도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어김없이 이곳에서 규탄 시위를 하고 돌담길을 따라 가두행진을 했다. 날카로운 반전(反戰) 구호를 외치며 정동길을 걷는 이들을 보던 상춘객들의 반응은 이랬다.

‘아, 우크라이나!’

○ ‘익숙해져버린 전쟁’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53일째. 사람들은 웬만한 우크라이나 피해 소식에는 놀라지도 않게 됐다. 하지만 이날 8번째 러시아 규탄 집회에 온 우크라이나인들은 시위를 멈출 생각이 없다.

크리스티나 씨는 “우리도 지치고, 번아웃 된 게 사실”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어려운 환경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우리나라가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한국에 있는 우리도 힘을 다해 도울 것이다”라면서 “러시아가 자행하는 학살, 잔인한 전쟁은 결코 익숙해지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그래도 우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집회를 계속 하겠다”고 강조했다.

재한 우크라이나인 약 250명은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매주 집회 계획을 논의한다. 직장인도, 학생도 있고 크리스티나 씨 같은 주부도 있다. 직장 있는 사람들은 구호가 적힌 피켓을 만들거나, 국기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상징물을 만든다. 또 집회에서 연설을 맡거나 전쟁 관련 정보를 번역해 한국인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크리스티나 씨는 “나 같은 주부는 남들보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각종 행정업무를 돕고 있다”며 “일단 전쟁을 끝내는 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 전쟁의 아픔은 어른 아이 모두에게

17일 주한 러시아대사관 앞 집회에 참석한 크리스티나 마이단추크 씨(가운데)와 딸 에바(왼쪽), 남편 이반 씨.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크리스티나 가족은 경기도 동탄에 산다. 대전 광주 천안 부산에서 오는 이들도 있다. 자녀를 데려오는 사람도 많다. 아이들도 집회에 적극 참여한다. 조금 큰 아이들은 대부분 조국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 이해하고 있다. 크리스티나 씨는 “아이들도 부모만큼이나 충격을 받았다. 전쟁 때문에 고국에 갈 수 없고, 돌아간다 한들 집뿐만 아니라 도시가 다 파괴됐다는 사실에 아파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태어난 초등학교 6학년 딸 에바(12)도 이따금 시위에 동참한다. 학교에서 전쟁 관련 기사를 보여주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대충 알고 있다. 다만 크리스티나 씨는 자세한 이야기는 피하고 있다. 충격을 받을까봐 두려워서다. 가뜩이나 우크라이나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딸에게 걱정을 더해주고 싶지 않다.

“늘 딸에게 ‘전쟁 중인 건 맞지만 우리 군대는 강하고 모든 나라들이 도와주고 있어. 그러니 우크라이나가 반드시 이길 거고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야. 걱정하면서 울 필요 없어’라고 말해줘요.”

그의 남편 이반 마이단추크 씨의 형은 수도 키이우 인근 마카리우에 머물다 지난달 부모님이 사는 서부로 피란 갔다. 그나마 일찌감치 대피해 목숨은 구했지만 형의 집은 미사일에 맞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필름카메라 촬영이 취미인 이반 씨는 시위에 나올 때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해마다 여름이면 우크라이나에 있는 가족들과 여행하며 추억을 담았던 카메라다. 하지만 이제 필름에는 시위와 집회 장면이 웃는 가족들 얼굴을 대신하고 있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

Read Previous

네팔선교의 날을 기억하세요 – 기독신문

Read Next

윤석열 당선인, 2022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 참석 예정 : 사회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Don`t copy t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