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은 직업 구성하는 절대 요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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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직업 경력이 20년이 되어 가는 남성입니다. 과거 금융 분야에서 근무했는데, 일이 잘 풀렸고 연봉도 높게 받고 능력을 인정받아서, 저는 직장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금융계가 워낙 빨리 은퇴하는 분위기라서 오래 일할 수 있는 내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작은 사업을 시작했는데, 경기가 급속히 나빠지면서 사업을 접고 다시 금융 분야에 취업하게 됐습니다.


다시 돌아온 금융시장은 몇 년 전과 많이 달랐습니다. 대부분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으로 사람을 뽑았습니다. 일하는 기간도 짧아져 몇 년 지나면 퇴출당하는 분위기가 됐습니다. 저는 다행히 계약직으로 취업했지만 다시 시작한 직장 생활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 지시에 따라야 했고, 제 입장에서 딱 봐도 안되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됐습니다.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제 자신에 대한 한계와 모욕감, 무능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도 이렇게 일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고 아는 분 소개로 회사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계약직으로 일할 때부터 직장에 대한 불안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저는 아내와 함께 새벽 기도에 나가 하나님 뜻을 구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했기 때문에 새로운 직장은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하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곳에 가서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면서 저는 퇴사와 이직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난 1년간 직장 3곳을 다녔습니다. 어떤 곳은 자의로, 어떤 곳은 타의로 그만두게 됐습니다. 지난 2~3년간 새벽 기도를 하고, 이직할 때마다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느끼는데 왜 계속 다닐 수 없을까요.


저는 이직하면 그곳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라고 생각해 열심히 일합니다. 가정 예배를 하면서 직장과 상사를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저는 지금 겪는 어려움이 주님이 저희 가정을 세우기 위해 주신 훈련이라고 생각해 가정 예배를 하고 교회에 열심히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변하고 저희 가정도 변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제대로 된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걸까요.


저는 직장을 구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데, 들어가서 일하려 하면 직장이 너무 이상합니다. 규율도 없고, 조직도 없고, 체계도 없고, 승진이나 일하는 것 모두 엉망입니다. 참고 일하려 해도 사장들이 자기 마음대로 회사를 운영하고, 사람을 비인격적으로 대우합니다. 그런 곳에서 충성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하나님이 인도하신 직장이 맞다면 왜 이럴까요. 하나님의 인도가 무엇인가요. 시간이 갈수록 혼란스럽습니다.

질문자의 고민을 정리해 보자.

1)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들어온 직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일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이 없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이 맞는가. 맞다면 인도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2) 이렇게 형편없는 곳에서 일하는 것에 가치가 있는가.

3) 하나님이 나와 가정을 연단했고 변화했다고 생각하는데 왜 연단이 끝나지 않는가.

우리가 직장 생활하는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생계를 위해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한다. 적성이나 비전, 소명과 상관없이 일해야 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커리어가 없을 경우 특히 그렇다. 우리나라 직업 중 환경이 좋은 직업은 매우 적다. 내용면이나 환경, 대우에 있어서 질이 낮은 직업군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질문자는 여태 좋은 곳에서 대우받으면서 일을 해 왔다. 시스템도 어느 정도 갖춰져 있던 곳에서 일해 왔기에 그렇지 못한 곳에서는 적응을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좋은 직업군의 자리는 이제 많지 않다. 엉망인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일해야 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질문자도 알다시피 금융계는 일할 수 있는 나이가 정해져 있다.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40대에 은퇴하는 것이 현실이다. 일하는 시간이 짧아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이다. 짧은 시간에 많이 버는 대가로 조기 은퇴하는 직장 문화가 형성된 것이기도 하다. 과거에 받은 높은 연봉은 이제 잊어 버려야 한다.

지금까지 일해 온 시스템을 버려야 한다. 그렇게 못하면 일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받은 연봉, 문화, 일의 영역, 시스템을 생각하면 안 된다. 그보다 못하거나 그와 다른 상황이라고 생각해야 일할 수 있다. 지난 연봉의 1/3을 받으면서 더 많은 일을 해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냐고 물었는데, 그것은 모른다. 하나님 잘 믿는다고 그 사람만 좋은 직업을 가질 수는 없다. 한국의 현실이 그렇다. 지금까지 일해 온 경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아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일자리는 소수다. 그 외에는 적은 임금으로 일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을 닮아 가는 과정이다. 평생 하나님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닮아 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성품을 배워 갈 때 직업의 영역만큼 단련하기 좋은 곳이 없다. 직장에서 회피할 수 없는 상황을 견뎌 내는 것으로 성품을 배우게 된다. 인내, 겸손, 배려 등을 다양한 것을 견디는 일을 통해 배워 간다.

셋째, 자아실현이다.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어도 직업이 없으면 상실감에 시달린다. 존재감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일이다. 일하면서 인정받으면 자존감이 생긴다. 일하는 과정에서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배울 수 있다.

자신을 알아 가고 성장하는 과정이 직업 영역에서 일어난다. 처음에는 두려울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훈련이 되고, 노력을 통해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능력이 향상되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능력을 발휘하고 개발하는 과정이 직업을 통해 생긴다. 여기서 능력은 전문성과 일에 대한 센스, 대인 관계 처리 방법, 감정 조절법, 자기 성찰 능력 등이다.

넷째, 소명을 발견하고 그 삶을 사는 것이다. 처음부터 소명을 따라 사는 사람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소명을 알게 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다 보면, 그것이 소명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소명은 직업을 구성하는 절대 요소는 아니다. 사람에 따라, 일하는 시기에 따라 다르다. 소명과 무관하게 직장 생활을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모든 직업을 소명과 연관 지으면 안 된다.


질문자가 ‘하나님이 과연 나를 이곳으로 인도했는가’ 질문을 던졌는데, 스스로가 하나님의 인도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맞을 것이다. 나에게 맞는 곳, 좋은 곳, 내 은사가 계발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도 있는 곳으로만 하나님이 인도하신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그렇지 않다. 세상에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보다,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견뎌야 하는 곳이 더 많다. 더 많은 부분을 내려놓고 기도해야 할 수도 있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를 넘어서는 곳도 허다하다. 그것을 견뎌야 할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고, 거기서 배워야 할 것도 있다.

일하는 곳마다 형편없다는 말에는 질문자의 분노가 담겨 있는 듯하다. 질문자 눈높이에서는 허접하고 가치가 없는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도둑질이나 남을 속이는 일이 아니고서야 그 일을 할 가치는 있다. 오너가 형편없고, 열심히 일을 해도 그것이 오너를 배불리게 하는 불평등한 일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 다른 법적 문제이며, 그렇다고 해서 성실하게 일할 의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와 맞는 곳을 찾아 직장을 옮길 수도 있을 것인데, 그럴 나이와 시기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직장을 찾기보다 지금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는 시기다. 어떤 곳을 찾고 있는가. 내 생각에는 그런 곳은 구하기 힘들 것이고, 2~3년 견디면서 다음을 생각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질문자는 나와 가정이 변했는데, 왜 아직까지 직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지 불평하고 있다. 이런 불평은 늘 있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데 왜 이렇게 힘든가 등등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은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이다. 다만 그 시기는 오로지 하나님에게 달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테트리스라는 게임이 있다. 이 게임에서 사람들은 길쭉한 일자형 막대를 가장 기다린다. 그 막대를 기다리다가 그 부분이 채워지지 못하면 게임이 끝나고 만다. 테트리스를 잘하는 방법은 긴 막대를 기다리지 않고 그때그때 어떻게든 채워 넣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오랫동안 할 수 있다.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다. 자신과 맞는 것을 찾아 헤매기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다 보면 자신과 맞는 일을 하는 기회가 생긴다. 10년, 20년 직업을 갖고 생활해야 하는데, 이상만 좇아서 현실을 불만스럽게 보지 않았으면 한다. 견딜 수 있는 부분은 견디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사실은 비참한 일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정서적으로 잘 견디는 것이 질문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 다시 다른 삶이 펼쳐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병선 / 한병선영상만들기 대표, IVF(한국기독학생회) 기독 직장인 모임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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